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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cipit | 2010/03/29 07:35 | Thalia | 트랙백 | 덧글(0)

빨간모자를 다시 쓰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정치적으로 반듯한politically correct> 태도가 한 시대를 풍미함에 따라 전래 동화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쓰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동화에는 어떠한 유형의 약자를 빗댄 내용이 들어가도 안되고, 어떠한 소수 집단을 모욕하는 표현이 있어도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난쟁이는 이제부터 비표준적인 신장의 성인으로 불러야 한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는 뜻에서 나는 재미삼아 「빨간 모자」라는 동화를 재해석한 다음, 모든 인물들의 종교적, 정치적, 성적 선택을 아주 철저하게 존중하면서 그것을 다시 썼다. 이야기가 <정치적으로 반듯한> 분위기에서 전개되도록 공간적 배경은 미국으로 설정하였다. 미국에서 숲이 무성하여 야생 동물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내가 다시 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행복하게도 아직 청소년기에 도달하지 않은 빨간 모자라는 소녀가 어느 날 아침 위험을 무릅쓰고 숲 속으로 들어간다. 소녀는 <자연 보호 협회>의 회원이라서 버섯도 딸기도 따지 않는다. 소녀는 또 <동물의 세계와 완전하고 대등하게 교류하기 위한 모임>의 회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저 늑대와 같은 야생 동물들을 어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소녀는 늑대 한 마리를 만난다. 그 늑대는 <동성애를 하는 동물들의 모임>에 가입해 있다. 그 단체는 동물들과 인류 구성원들 사이의 자유로운 성관계를 권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늑대와 소녀는 근처의 모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늑대는 그곳에 가서 화려한 잠옷을 입고 소녀를 기다린다. 그런데 늑대와 소녀가 만나는 광경을 나무 그늘에 숨어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소녀의 할머니이다. 할머니가 가입한 단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할머니가 소아 성애와 근친 상간, 식인 풍습을 지지하고 채식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점만 밝히고자 한다. 한시라도 빨리 어린 손녀와 만나고 싶은 마음에 할머니는 모텔로 가서 늑대를 잡아먹고 늑대로 변장한다. 할머니는 <동물 분장자 협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빨간 모자는 달뜬 마음으로 모텔에 다다라서 늑대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간다. 그러나 소녀가 맞닥뜨린 것은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즉시 소녀를 추행한 다음 잡아먹는다. 할머니는 씹지 않고 통째로 삼킨다. 앞에서 깜박 잊고 이야기를 못했는데, 사실 할머니는 위생과 식이 요법을 중요시하는 어떤 종교 단체에 속해 있다. 그 단체는 동물의 고기를 씹는 것은 정결하지 못한 행동이자 죄악이라고 주장하면서 고기를 그냥 삼키라고 명령한다. 그런 것을 명령한다는 게 잘 믿기지는 않지만, 음부 폐쇄를 명령하거나 수혈을 금지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것 같다.

빨간 모자는 이제 할머니의 내장 속에 들어 있다. 그때 한 사냥꾼이 나타난다. 그는 여느 사냥꾼과는 달리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그는 비(非)수렵인이다. 그는 어떤 과격한 환경 운동 단체의 회원이다. 그 단체는 동물의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요구한다. 그는 자기가 맡은 역할 때문에 전국 라이플총 협회에도 가입해 있다. 그 단체는 모든 시민의 무기 소지를 허가하는 헌법의 한 수정 조항에 근거하여 결성되었다. 그 비수렵인은 할머니가 늑대를 잡아먹음으로써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총을 쏘아 죽인다. 그런 다음 할머니의 배를 가른다(그는 장기 기증 촉진 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빨간 모자는 할머니 뱃속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 늑대도 물론 빠져나오겠지만, 내 이야기에서 늑대는 이제 등장하지 않는다.


빨간 모자의 엄마는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아이를 껴안고 입을 맞춘다. 엄마는 그 슬픈 사건을 잊게 하려고 애쓰면서 아이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던 차에 예의 그 비수렵인이 사냥 반대의 가치를 내건 아주 인기있는 TV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된다. 어린 딸을 둔 어머니들 중에는 자기 아이를 텔레비전 사회자에게 데려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텔레비전 사회자와 자기 딸이 다정한 친구 사이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그런 관계는 억대 출연 계약의 전조가 된다). 딸아이를 유명한 사회자에게 소개시킬 때 어머니들의 마음이 얼마나 많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비수렵인은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도덕적인 기질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서 빨간 모자와 친구가 되는 것을 거절한다. 사실 그는 숲 속의 로빈과 친하게 지내는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딸은 자기들이 무시당한 것에 너무나 화가 나서 앙갚음을 하기로 한다. 그녀들은 비수렵인이 할머니를 죽일 때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경찰에 그를 고발한다. 그녀들이 제시한 그의 범죄 혐의는 흡연, 악습교사(敎唆), 환경 오염, 발암 물질 유포, 살인 미수 등이다.

미국의 그 주에서는 사형 제도가 아직 시행되고 있다. 비수렵인은 전기 의자 처형을 선고받는다. 교황은 형의 감면을 요청하는 감동적인 서한을 보낸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우체국을 통해 보낸 그 서한은 몇 달 늦게 미국에 도착한다. 게다가 전기 쇼크는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기 때문에 처형에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결국 비수렵인은 죽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1996년)
 

by incipit | 2008/12/26 14:19 | Pastiches | 트랙백 | 덧글(3)

참된 보수주의자는

 


-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인식을 경시하지는 않으나, 그것이 원칙을 동반하지 않을 경우에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후퇴도 마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때때로 일단 후퇴한 후에 전진하는 편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흔한 보수반동이나 전통주의자, 회고주의자와 구별되어야 한다. 보수주의자는 보편적인 원칙의 영향에서 피할 수 없다고 하지만, 새로운 과제에는 새로운 대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실패한 경험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즉 역사를 경시하지 않는다.

- 자신이 '내일의 인간'은 되지 못해도 '모레의 인간'이 될 수는 있다고 확신한다. 내일의 인간이 실패로 끝난 후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 모레의 인간이다.

- 새로운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편들고 일어서는 무지함에 가담하고 싶지 않아할 뿐이다.

- 원래부터 추상적인 사고를 싫어하는 자요, 경험에 의하지 않은 이론 일변도를 즐기지 않고, 평생 찰나주의와 무관한 사람이 많다.

- 자연스러운 사회의 요소들은 사유재산, 가족, 국가, 종교라고 생각한다.

- 무엇보다 책임감을 중시한다.

-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은 본질적으로 어느 시대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개혁은 그런 하나하나를 모아 강한 인내심으로 밀고나갈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 정치상의 변혁에 무관심하지 않다. 단지 그 변혁이 신중하고 올바르게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듯 행해지도록 바랄 뿐이다.

-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빈곤과 문맹과 기아를 추방하기 위해서는 조금씩 끈기 있게 한 나라씩 손을 써나가야 할 과제라고 여기고 있다.

- 언젠가 반드시 혁신이 보수화 하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 일부 사람들의 빈곤과 실패가 언제나 사회조직의 결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개선은 장애를 짊어진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제도, 말하자면 패자부활전과도 같은 제도로 해결하는 편이 사회조직의 전반적인 개선보다도 유효하다는 사실에 눈뜨고 있다.

- 장기간에 걸쳐 사회에서 통용되어온 제도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장기간 유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 등장하자마자 당장 대중에게서 큰 호평을 받는 신인을 신용하지 않는다.

- 공동체의 중요한 목표가 그 구성원들의 관습이나 풍속의 특성을 지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민속이나 종교 또한 지켜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구성원 개개인의 힘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끌어 공동체 전체의 힘을 향상시키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 한 조직이나 제도의 개혁이나 변혁에 신중하다. 사회의 쳇바퀴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기능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개혁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은 개혁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기고 있다.

- 공동체의 끊임없는 발전을 위해서 우수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건강한 자와 아픈자, 적극적인 사람과 소극적인 사람 등과 같이하지 않고 이들을 분리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있다.

- 건강, 연령, 성별, 외모, 교육, 재능, 힘, 그리고 용기, 더욱이 의지력이나 정직함, 그 밖에 다른 어떤 면으로도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믿고있다. 운명조차도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지 않다. 그리고 이런 진실을 외면하는 사회는 머지않아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국가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국가가 모든 사람을 관리하려는 사태는 그것이 복지라 할지라도 흐뭇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귀착되는 곳은 비능률이라는 사실 단 한가지 뿐이기 때문이다.

- 소수에 의한 부의 과도한 집중도, 다수의 과도한 빈곤도 모두 사회적인 위기로 판단한다. 그리고 과도한 부자와 과도한 빈자를 억제하여 사회를 조화롭게 이끌어, 보다 폭넓게 중산층을 육성하고 보호하는 것을 중시한다.

- 개개인이 속으로 가진 욕망이나 보다 좋은 지위와 환경에 대한 욕망을 국가가 행하는 안이한 대책보다 신뢰하고 있다.

- 개인의 자유가 발명이나 진보나 발견의 소지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약자에 대해서는 잔혹한 결과를 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가 언제 해로운 것으로 돌변하는지를 알려주는 시계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권리로서가 아니라 의무로 생각함으로써 그 시기를 예측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인정하더라도 역사가 같은 형태로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누구라도 자신의 한계를 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에서 배울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갖가지 예를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혁신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역사를 창조한다고 여기고 있으므로 역사를 경시한다.

- 관료제도의 팽창, 자국의 방위를 다른 나라에 의뢰하는 것, 장기간에 걸친 무거운 세금, 평가에 인색한 것 등이 언제나 사회가 쇠퇴해가는 전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민족 독립의 마지막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 부(富)가 재능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과, 그렇다고 빈곤이 장점이 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좋은 사회는 어차피 좀더 적극적인 자, 정직한 자, 지혜로운 자, 재능이 있는 자가 지도적인 지위에 임할 수 있는 사회라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 대개 인간 일반에 대해 비관주의자다.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에는 선인이요, 악인이 사회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선인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평생 선인일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선인인 채로 있을 수 있다는 것, 바꿔 말하자면 악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은 개인의 작은 노력에 의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도, 의무의 관념도, 그리고 인간적인 것을 존중해주는 마음도 소수인만이 가지는 '덕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 소수인에 의한 지배든 다수인에 의한 지배든 어느쪽에도 약간의 의혹을 느끼고 있다.

- 유권자 개개인은 자신의 마을이나 도시의 정치에 대해 대개 어느정도까지는 상당히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이 경우 가까운 시점에서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나 특별시의 규모가 되면 일개 시민의 시점만으로는 이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 더욱이 국가 범위의 정치가 되면 완전히 일반인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나,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개 시, 군, 면에 대한 판단과 같은 시점으로 종종 한 나라의 외교까지도 즉석에서 판단해버리기 때문이다. 정치전문가란 일개 시민의 시점과 통치자의 시점, 쌍방을 가지고 그것을 경우에 따라 균형을 유지해가며 쓸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참된 보수주의자는 국가의 정치외교를 이러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갖지 않은 정치가는 언제나 존재한다. 오히려 수적으로 볼 때는 이쪽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보수주의자는 보통선거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 외교 숭배나 이국 취미를 배제한다. 이러한 경향이야말로 국민이 퇴폐하는 조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보수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언론의 자유는 절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점은 마찬가지다. 단지 이런 자유를 쓴다는 것은 언제나 사회에 대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것도 믿고 있다.

-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엄성이 사회 생활의 활력을 북돋아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권리라기 보다는 국가에서 하사받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인간이 고안해낸 모든 제도가 완벽은 커녕 불완전투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완전무결한 제도는 조물주조차도 만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만큼 없는 것보다야 낫다는 관점이 의외로 진보에 공헌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주세페 프레치올리니





당신은 얼만큼이나 보수주의자인가?

by incipit | 2008/06/05 04:42 | Pastiches | 트랙백 | 덧글(4)

레오 롱가네지 (Leo Longanesi)

 
1938년 12월 15일
팡파르, 깃발의 물결, 끊임없는 행진.
한 사람의 바보는 한 바보.
두 사람의 바보는 두 바보.
만 사람의 바보는 '역사적인 힘'이다.

1940년 5월 20일
연합군은 브뤼셀 서쪽으로 퇴각했다. 가멜랑 장군은 프랑스 군에게 이런 훈시를 늘어놓았다.
"우리 모두의 희망은 이제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있다.
여러분은 우리 민족정신의 근본인 군의 투혼으로 가득한 젊은 가슴으로
우리 국가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야 한다."
어느 이탈리아 장군의 훈시라도 듣고 있는 듯하다.
프랑스는 클레망소와 함께 죽었다. 숨겨본들 헛일이 아닌가.

1940년 5월 27일
모든 혁명은 거리에서 시작하여 식탁에서 끝난다.

1941년 1월 10일
영국인은 이 전쟁에서 이기리라. 그들은 전쟁 이외에는 무엇이든 해내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이 전쟁에서 지리라.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전쟁밖에 없기 때문이다.

1941년 8월 1일
집으로 돌아왔다. 자정이었다. 라디오를 켜자 모스크바 방송이 들려왔다.
러시아인도 거짓말을 잘한다. 전황 방송은 언제나 이렇게 끝났다.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 더구나 무조건 단결하라니 어림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 한마디가 얼마나 잘 된 슬로건인지는 충분히 인정하겠다.

1941년 8월 29일
A가 들려준 에피소드다.
얼마 전 학기말 시험 기간 중에 문교부에서 파엔차 마을로 교육관이 시찰을 나왔다.
교육관은 마침 A의 여동생이 담임을 맡고있는 학급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한 학생을 지명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눈을 감아보아라."
한참 있다가 또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 학생은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대답했다. 짜증이 난 교육관은 여교사를 보며 말했다.
"아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니, 무솔리니 총통님이 보여야 할 것 아니오!"

1941년 11월 6일
무솔리니의 리토리아 방문 기사를 싣는 데 대해 각 신문사로 정부 시달이 왔다.
모든 관련기사에 반드시 다음 한 구절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총통 각하께서는 현관 계단을 젊음이 넘치는 발걸음으로 활기차게 오르셨다.'

1942년 9월 13일
극장에 가다. 데 필리포 형제의 연기를 보다. 정말 지금으로서는 최고의 배우들이다.
그들은 진실을 너무나도 잘 연기해서 우리가 이탈리아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할 정도다.

1944년 1월 8일¹
모든 신문 지상에 다음 기사가 실렸다.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스탈린 원수에게 훈장을 보내다."
이것으로 임금과 커뮤니스트가 사촌간이 되었다.

1944년 1월 14일
미제 통조림 고기는 기쁘게 먹겠다. 그러나 거기에 따라온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접시에 남기기로 했다.

1944년 2월 8일
우리 국내 망명자들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 급사에게 50대쯤 되는 한 미국인 소령이 여자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조건은 젊은 여자가 아니라 서른 살 정도가 좋겠고, 조용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결혼 경험이 있을 것, 더욱이 미망인이라면 그보다 나을 게 없겠다고 했다. 이 미국인 소령에 의하면 이런 조건을 달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란다. 50대의 이 미국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가정의 평화,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깨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빈첸초라는 급사는 물론 이런 고객의 희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며칠 후 적당한 여자를 찾아내었다. 세련되고 홀쭉한 미인으로 성실하고 품위있고, 더구나 미망인이었다. 그 소령은 이 미망인의 집에 거의 매일처럼 갖은 선물을 들고 방문했다. 그러나 미망인은 1주일에 한 번은 소령과 함께 남편 묘소를 찾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감싼 젊은 미망인은 죽은 남편의 묘소 앞에 꿇어앉아 꽃을 바치며 조용하게 훌쩍이는 것이었다. 미국인 소령은 그 옆에서 겸허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같이 기도했다.
빈첸초는 우리에게만 살짝 말해주었다.
"사실 저 여자는 미망인이 아니랍니다. 그 무덤도 모르는 사람의 것이고요.
그렇지만 누가 뭐라겠소, 아무튼 우선은 살고 봐야죠."

1944년 8월 11일²
신생 이탈리아 문인들은 일제히 좌파를 선언했다. 마치 좌파는 우파보다 훨씬 상상력이 풍부한 세계라는 듯이.

1944년 8월 13일
생선 요리를 나이프를 써서 먹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스스로를 좌파라고 여기고 있다.³

1944년 8월 19일
"당신은 민주주의자입니까?"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장래에는 그렇게 될 것 같습니까?"
"가능하면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왜요?"
"파시즘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독재정권 아래에서라야 겨우 민주주의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요."

1944년 10월 9일
무슨 사상이나 주의주장이 나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다.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이들 사상이나 주의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1. 연합군 상륙. 이탈리아 북상 중. 이탈리아, 연합군과 단독 강화.
나폴리까지는 행방. 그 밖에는 전부 독일 점령. 롱가네지, 파시스트에 쫒겨 나폴리로 몸을 숨김.
2. 1944년, 로마도 '해방'됨.
3. 생선 요리의 식사에는 나이프를 쓰지 않음.






구미권에 왜 롱가네지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구글을 뒤져도 영문으로 나오는 건 단상 나부랭이 뿐이다. 이탈리아어를 배우던가 해야지 이거야 원.

by incipit | 2008/03/15 07:43 | Pastiches | 트랙백 | 덧글(13)

어떤 반(反)민주주의자의 선정론(善政論)

 

A: 나는 사려깊은 사람들보다는 사려깊지 못한 사람들을 우대하는 정체를 택한 아테네 사람들이 싫습니다. 그러나 택한 이상 그것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실증해보이고 싶습니다.

우선 빈민이나 일반 대중이 부자나 엘리트보다 우대되는 것은 국가를 강하게 하는 원동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그들인만큼 참으로 당연합니다. 그리고 선거든 추첨이든 이 사람들이 국정에 참가하는 것도, 국회에서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발언할 수 있다는 규칙과 함께 당연한 권리죠.

하지만 대중은 다음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의 재능이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군대의 장성과 같은 직책에는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맡기는 쪽을 택하지만, 반대로 그런 위험이 없고 안정된 보수나 기타 잡수입을 얻을만한 직책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들 스스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른 나라사람들은 아테네가 이렇게 신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넓은 활동 분야를 주고 있는 현상에 놀라고 기가 막힐 것이나,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키고 또 강화하는 가장 좋은 길이란 점을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온 세계의 사려깊은 사람들은 모두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려깊은 사람들의 특질이 시종일관된 사상과 부정을 기피하고 개선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하는 것에 있다면, 대중의 특질은 무지하며 무질서하고 뛰어난 자에 대한 질투에 있기 때문입니다. 빈곤은 불명예를 이끌고, 교육이 결여되면 저질과 무례함을 낳습니다.


B: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은 이렇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집회에서는 누구든지 말하고 싶은대로 지껄이게 둘 것이 아니라, 능력있고 사려깊은 사람들에게 우선 발언시켜야 한다고 말이지요.


A: 당치도 않은 소리! 집회는 보다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발언을 허락함으로써 이상적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려깊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되는 것만을 제안하기 때문이지요.


B: 하지만 사려깊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것이 자신에에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까?


A: 그들도 재능은 있지요. 무지하든 무능하든 이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단결'은 현명하고 재능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기 쉬운 경쟁의식,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분열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말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구성분자의 대부분을 이루어서는 이상적인 국가라고 말할 수 없지요. 그러나 이상적인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키기에는 가장 적합합니다.


B: 확실히 대중은 선정 아래서의 노예보다 악정 아래서의 자유민 쪽을 택하겠지요. 이는 대중이 선정인지 악정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말인가요?


A: 아니지요. 관심은 대단합니다. 왜냐하면 사려깊지 못한 사람들은 당신이 말하는 악정 아래서라면 그들이 가진 힘을 더욱 휘두를 수 있고, 그들의 자유를 더욱 구가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당신이 추구하는 선정이 실시되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답니다.

우선 재능있는 사람들이 법을 만들게 되고, 그것에 의해 지위를 얻은 사려깊은 사람들은 사려깊지 못한 사람들이 멋대로 구는 것을 용서치 않을 겁니다. 정치도 사려깊은 사람들이 하게되고, 국회에서도 무책임하고 선동적인 발언은 자취를 감추게 되겠지요.

이렇게 하여 머지않아 선정이 실시되면 대중의 노예화는 실현됩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사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말을 아테네의 민주주의로 돌리자면, 선정이라고는 농담도 못할 지금, 아테네의 상황은 이후에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작은 개선이 한도일 겁니다. 민주주의 정체 아래서 일어나는 비능률, 무능한 자의 전횡, 일관된 정책의 결여는 이 정체에 체질적으로 수반된 결함이니, 근본적인 개혁이란 민주주의를 지키는 한 불가능할 겁니다.

물론 정치체계가 가지는 결함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민주주의도 지키고 싶고, 선정도 필요하다는 말은 완전히 억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작은 개선이라면 물론 가능합니다.


B: 제가 생각하기에 아테네 사람들은 또 다른 면, 즉 외교 면에서도 사려가 깊지는 않은 것 같아요. 다른 나라와 공동전선을 펴야 할 때 아테네 사람들은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무능한 파트너를 택해오지 않았습니까.


A: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들로서는 여기에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습니다. 혹시 동맹자 가운데 유능한 자를 택한다면 그 결과가 생각과는 달리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을 불리한 상태로 빠뜨릴 위험이 있어요. 왜냐하면 도시국가치고 그 구성분자중에 유능한 사람들이 대중에 호의를 갖고있는 예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도 서로 닮은 사람들끼리 서로 돕는 다는 격언이 참되다는 것을 실증해줄 뿐이지요. 그 때문에 아테네 사람은 언제나 무능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나라와 동맹을 맺어온 겁니다.

또 유능한 자와 동맹을 맺은 경우는 그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지요. 포에티우스의 좋은 예가 있지 않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나라 대중은 노예 상태가 되었지요. 밀레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유능한 자가 아테네와 동맹을 맺어 힘이 강해지면 그 나라 민주주의자들은 언제나 철저하게 타도당하지 않습니까.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은 경우를 생각해보시오.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서로간의 공동의 적을 타도한 후 곧 아테네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던가요.


B: 화제를 바꾸지요. 개인의 권리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종종 듣는 말이지만, 아테네에서는 누구 한 사람도 부당하게 개인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그리 이상적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A: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선에서 말하자면, 부당하게 개인의 권리를 침해받은 자가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동파에 속한 소수인으로서 문제삼을 만한 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도 완벽하게 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어 있는 나라에서 그런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B: 저는 부당하게 침해당한 자를 일컫는 것으로, 어떠한 죄를 범해 정당한 벌을 받은 자를 말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A: 그러나 대중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지금의 아테네에서, 벌받은 자의 대부분이 부당하게 벌받았다고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테네에서 벌받은 자, 즉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한 자는 공금횡령이나 공공이익에 거스르는 생각을 가진 자가 아니면 국가 반역죄를 저지른 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공공이익이란 물론 국가의 다수를 다스리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이라는 뜻이지만, 결과적으로 이익이 되지는 못해도 그런 것을 민주주의를 지키는 자로서 문제삼아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지금, 아테네 민주주의의 진짜 적은 중우정치도 반체제파의 반격도 아닙니다. 다름아닌 선정이요, 선정을 추구한 나머지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없는 자입니다.


B: 그렇다면 공격과 방어 자세를 바꾸어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말해봅시다. 자유를 지키고 확립하기에는 민주주의가 최고라고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더구나 반민주주의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도 자유를 부르짖지 않습니까.


A: 그것은 자기 편을 속일 뿐 아니라 저 스스로도 속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민주주의가 자유보다는 폭력과 가깝다는 사실에 아직 눈뜨고 있지 않답니다. 민주주의의 탄생은 폭력과 결부되어있다는 사실을 플라톤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대중이 승리를 거두면 곧 윤택한 자들 몇몇은 살해당하고 살아남은 자는 추방당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면 내가 말할 것은 없지요.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인 다수결제도는 50%에서 한표를 더 획득한 측이 자신의 신념을 강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소수파의 의견도 존중하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본원리에 반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어제의 소수파가 내일의 다수파로 바뀔 환경이 존재하느냐 않느냐로서, 혹시 만족할만한 상태로 그런 환경이 존재하는 나라라면 비로소 민주주의와 자유는 결부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는 오늘의 아테네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데모크라티아(Democratia)의 '데모'란 다수를 뜻할 뿐 아니라, 시민들 가운데 가난한 자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난한 자는 상대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결과적으로 그들은 언제나 다수파가 됩니다. 민주주의에서는 질에 대해 전혀 문제삼지 않습니다. 양만이 지배하는 세계니까요.


B: 어쩐지 절망적인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자유를 수호하는 역할뿐 아니라 평등의 개념을 현실화한다는 명예도 있지 않습니까?


A: 완전한 자유를 얻는 자만이 완벽한 평등을 누릴 수 있다고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자유와 평등은 결코 양립될 수 없습니다.

우선 민주주의자들은 자유보다도 평등 쪽을 선호하기 때문이지요. 왜냐하면 자유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만족만을 주지만, 평등은 하루하루 새롭게 작으나마 물질적인 만족을 주거든요. 평등의 개념을 급진화시킨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개개인의 자유를 파괴하는 데에 얼마나 공헌했는지를 돌이켜보면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습니다.

참된 자유를 존중하는 자들은 법을 존중하지요. 이런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는 법의 확립이야말로 국민들의 활력을 불필요하게 소모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려 깊지 못한 사람들은 인민 자체가 법이라는 그들의 선전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을 존중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사려 깊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선정이란, 단 하나의 주의주장으로 해결될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민심 안정의 제2대 요소인 법의 평등한 실시와 이익의 공정한 배분은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의 성과는 아니니까요.

인류는 언젠가 요술이라도 써서 이익의 평등한 분배에는 성공할지 몰라요. 그러나 개개인의 머릿속에 든 것까지 평등하게 분배하기까지는 아무리 시대가 발달하더라도절대 불가능할 겁니다. 이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한 우리의 이데올로기 장난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도 서로가 적대시하며 폭력적으로 말이지요. 묘비명조차 이렇게 새겨져 있지 않습니까.

'짧으나마 무지한 민중의 폭동을 제지한 가치 있는 삶을 산 남자들에게 바친다.'

by incipit | 2007/06/08 09:24 | Pastiches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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